중세 아랍의 과학자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를 ‘비행 시도’로만 소비하지 않고, 유리·석영·렌즈 같은 재료 실험과 관측 장치, 실패를 줄이는 위험관리 사고까지 공학적으로 풀어냅니다. 오늘의 R&D 관점도 함께 정리했습니다.
“상상력”은 공학에서 무엇으로 증명될까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ʿAbbās ibn Firnās) 이야기는 종종 한 장면으로 요약됩니다. “날아보려 했다.”
그런데 공학적 상상력은 멋진 시도 자체가 아니라, 보통 이런 방식으로 증명됩니다.
- 재료를 바꾸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기록한다
- 위험을 줄이기 위해 조건을 조정한다
- 실패했을 때 원인을 추정하고 다음 실험에 반영한다
- 무엇보다, “누가 다시 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 방향으로 지식을 남긴다
이 관점으로 보면, 중세 아랍의 과학자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는 ‘비행’보다 더 넓은 실험가입니다. 유리·석영·렌즈 같은 재료 기술, 관측 장치에 대한 관심, 그리고 전승 속 비행 시도까지 모두가 **“자연을 다루는 손의 언어”**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 대략 연대기: 사건보다 “실험가의 흐름”으로 읽기
중세 인물의 세부는 전승과 후대 기록에 의존하는 부분이 있지만, 큰 윤곽은 비교적 널리 공유됩니다.
- 출생: 대략 809/810년경, 알안달루스(오늘날 스페인) 론다(Ronda)로 소개
- 활동 무대: 코르도바(Córdoba) 중심의 학문·기술 환경
- 알려진 작업 범주: 발명·천문·공학·의학 등 다방면의 폴리매스(다재다능한 학자)로 소개
- 사망: 887년, 코르도바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음
이 연대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어느 해에 무엇”보다, 그가 살던 알안달루스의 분위기입니다. 이미 지식이 축적되던 시기에, 그는 재료와 장치라는 ‘현장형 문제’를 실험으로 다루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왜 ‘재료 실험’이 공학적 상상력의 핵심인가
아이디어는 머릿속에서 끝날 수 있지만, 공학은 재료 앞에서 드러납니다.
- 같은 설계라도 재료가 바뀌면 강도·마찰·투명도·내구성이 달라지고
- 재료가 달라지면 가공법이 달라지며
- 가공법이 달라지면 **품질 관리(불순물, 균열, 편차)**가 핵심이 됩니다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가 “유리 제작(무색 유리)”이나 “석영 가공”, “읽기용 렌즈(읽기돌, reading stones)” 같은 항목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단순 발명이 아니라 공정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유리·석영·렌즈: 투명도를 만드는 ‘공정 사고’
투명함은 ‘재료의 성질’이 아니라 ‘불순물 관리’에서 나온다
무색(투명) 유리는 그냥 “예쁜 유리”가 아닙니다.
실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과제가 붙습니다.
- 원재료(모래/석영)의 불순물 제거
- 가열·냉각 과정에서 생기는 기포와 균열 관리
- 일정한 품질(투명도)을 반복 생산하는 방법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는 무색 유리 제조, 석영(rock crystal) 가공, 그리고 읽기용 렌즈(읽기돌)를 만든 인물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최초’ 논쟁보다, 그 시대에 광학과 재료가 실용 기술로 연결되었다는 점입니다.
렌즈는 ‘시력 보조’ 이전에 ‘측정 도구’가 된다
렌즈가 생기면, 글을 읽는 편의만 늘어나는 게 아닙니다.
작은 문자·세밀한 선·미세한 균열을 더 잘 보게 되면서, 공학은 자연스럽게 정밀 관찰로 이동합니다.
즉 렌즈는 단순 소품이 아니라, “관찰의 해상도”를 높이는 장치가 됩니다. 이런 장치가 누적될수록 기술은 더 빠르게 개선됩니다.
관측 장치와 ‘실내 천문’: 자연을 실험 가능한 환경으로 바꾸기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는 별과 행성의 운동을 보여주는 장치(모형/기구)를 만들었다는 식으로도 소개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멋진 장치”가 아니라 자연 현상을 실험 환경으로 옮기는 발상입니다.
- 하늘은 그대로 두면 통제할 수 없다
- 통제할 수 없으면 비교·반복이 어렵다
- 그러면 장치로 축소해 “조건을 고정”하고 패턴을 본다
이 흐름은 현대의 실험실 과학과 닮았습니다. 실험실이란 결국 자연을 작게 만들고, 조건을 고정해, 다시 자연으로 확장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비행 시도 일화: “전설”이 아니라 “실험 기록”으로 읽는 방법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에게 늘 따라붙는 유명한 이야기가 무동력 비행(활강) 시도입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동시대 9세기 문헌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기보다, 후대 역사가 알마까리(al-Maqqari, 17세기)가 전한 일화로 널리 퍼졌다는 점을 함께 봐야 합니다.
핵심은 “날았다/안 날았다”가 아니라, 실패 원인을 해석했다는 부분
후대 전승에서는 그가 깃털과 날개 형태의 장치를 만들고 어느 정도 거리를 날았지만, 착지에서 다쳤고 “꼬리(착지 보조)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식의 서술이 반복됩니다.
이 대목이 공학적으로 흥미로운 이유는 명확합니다.
- 실험은 성공 장면보다 실패 원인 분석에서 지식이 커진다
- 착지는 비행의 일부이고, 착지를 설계하지 않으면 시스템은 완성되지 않는다
- “왜 다쳤는가”를 설명할 수 있으면, 다음 시도는 더 안전해진다
즉 이 이야기가 사실로 얼마나 정확한지와 별개로, 우리가 가져갈 교훈은 **‘위험관리 관점이 들어간 실험 서사’**라는 점입니다.
‘아르멘 피르만(Armen Firman)’ 혼동도 같이 알아두기
일부 2차 서술에서 “아르멘 피르만”이라는 인물이 먼저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붙기도 하지만, 이 인물은 기록의 신뢰성과 관련해 혼동 가능성이 지적되며, 오히려 이름이 혼합·라틴화된 결과일 수 있다는 정리도 있습니다.
이런 지점은 오히려 과학 글쓰기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재미있으니 믿자”가 아니라, 출처의 층위를 구분하고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을 분리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위험관리 관점: 공학적 상상력은 “용기”가 아니라 “절차”다
비행이든 재료 실험이든, 위험은 늘 따라옵니다.
그래서 공학적 상상력은 대담함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1) 위험을 ‘사고’가 아니라 ‘변수’로 본다
- 높이, 속도, 착지 방식
- 재료의 파손, 열처리 편차
- 반복 실험에서의 누적 피로
위험을 변수로 보면, 곧바로 질문이 바뀝니다.
“할까 말까”가 아니라 “어떤 조건을 바꾸면 위험이 줄까?”가 됩니다.
2) 안전장치는 ‘겁’이 아니라 ‘다음 실험을 위한 비용 절감’이다
한 번 크게 다치면 실험은 끝납니다.
반대로 작은 실패로 멈추면, 개선이 가능해집니다. 기술은 결국 살아남은 실험의 누적입니다.
3) 기록은 최고의 안전장치다
어떤 조건에서 균열이 났는지, 어떤 조합에서 결과가 좋았는지 남기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기술 확산의 시작입니다.
중세 아랍의 과학자 관점에서 본 이븐 피르나스의 진짜 매력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를 “비행 선구자” 한 줄로만 소개하면, 오히려 폭이 줄어듭니다. 그는 다음 세 가지의 결합으로 읽을 때 더 선명합니다.
- 재료(유리·석영·렌즈)
- 장치(관측·모형·기구)
- 실험 서사(시도–실패–개선의 방향성)
이 결합은 현대의 R&D와도 닮았습니다. 소재가 없으면 제품이 없고, 장치가 없으면 측정이 없고, 개선 서사가 없으면 기술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 번의 쇼”가 아니라 중세 아랍의 과학자들이 가진 공학적 탐구 태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읽힙니다.
자주 묻는 질문 3가지
Q1. 이븐 피르나스는 정말 최초의 비행을 했나요?
후대 기록(알마까리 전승)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동시대 1차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는 형태는 아니라는 점에서 사실성의 층위를 구분해 보는 게 안전합니다. 다만 “비행 시도” 자체가 전승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것은 분명합니다.
Q2. 왜 유리·렌즈 이야기를 같이 봐야 하나요?
공학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재료–가공–관찰–개선의 축적입니다. 유리/렌즈는 관찰을 정밀하게 만들고, 정밀 관찰은 다시 재료와 장치를 개선시키는 선순환을 만듭니다.
Q3.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뭔가요?
“상상력”은 낭만이 아니라, 실험을 설계하고 위험을 줄이며 기록으로 남기는 능력이라는 점입니다. 그 의미에서 이븐 피르나스는 ‘비행’보다 더 넓은 실험가로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비행보다 오래 남는 건 ‘실험의 태도’다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를 제대로 읽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그를 “비행에 성공했는가”로만 평가하지 말고, 무엇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고, 어떤 방식으로 기술을 축적하려 했는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 투명한 유리와 렌즈는 “보는 능력”을 확장했고
- 장치와 모형은 자연을 실험 가능한 환경으로 옮겼으며
- 비행 일화는 ‘도전’보다 ‘착지/안전/개선’이라는 공학적 질문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전설 속 인물이 아니라, 중세 아랍의 과학자들이 공학적 탐구를 어떤 태도로 밀어붙였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