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아랍의 과학자 이븐 할둔은 사회를 도덕 훈계가 아닌 관찰·개념·검증으로 설명했습니다. ‘사회 분석’이 과학이 되는 조건을 한 편으로 정리합니다.
들어가며: 사회를 말하는 글은 왜 쉽게 “의견”이 되는가
정치, 경제, 문화, 인간 관계를 설명하는 글은 늘 많습니다. 그런데 사회를 다룬 글의 상당수는 시간이 지나면 금방 낡습니다. 유행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검증 가능한 구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 사례는 많은데 기준이 없다
- 결론은 강한데 비교가 없다
- 감상은 풍부한데 원인이 없다
- 비판은 있는데 반증 가능성이 없다
이븐 할둔(Ibn Khaldun)이 특별한 이유는, 사회를 “말솜씨”로 정리하지 않고 과학처럼 다루는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글에서는 그 조건을 실험 과학의 언어로 번역해, 왜 그의 사회 분석이 오래 남는지 풀어보겠습니다.
이븐 할둔을 이해하는 기본 배경
이븐 할둔은 흔히 “역사가” 혹은 “사회사상가”로 소개됩니다. 하지만 그를 더 정확히 읽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 그는 사회를 “사건 목록”으로 쓰지 않았다
- 사회를 반복되는 구조로 설명하려 했다
- 기록을 그대로 믿지 않고 자료 비판을 먼저 했다
- 도덕적 판단보다 원인–조건–결과를 우선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븐 할둔은 중세 아랍의 과학자 전통이 자연 현상뿐 아니라 사회 현상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읽힙니다. 즉 “사회 분석” 자체가 연구 대상이 되는 순간을 만든 셈입니다.
‘사회 분석’이 과학이 되는 조건 1: 관찰을 ‘단위’로 잘라 기록한다
과학은 관찰을 “멋진 문장”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비교 가능한 단위로 만드는 데서 시작합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이 아니라 조건을 기록한다
전쟁, 왕조 교체, 반란, 세금 인상 같은 사건은 눈에 띕니다. 하지만 과학적 분석은 사건 뒤의 조건을 먼저 봅니다.
- 어떤 집단이 결속했는가(연대의 강도)
- 경제 기반은 무엇인가(세금, 교역, 생산)
- 행정·군사 조직은 어떤 형태인가
- 도시화는 어느 단계인가
- 사치와 비용 구조가 어떻게 변했는가
이런 조건이 정리되면, 사건은 “우연”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결과”가 됩니다.
‘사회 분석’이 과학이 되는 조건 2: 개념을 만들어 현실을 압축한다
사회는 변수가 너무 많아 그대로는 분석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개념(모델의 단어)**입니다. 이븐 할둔은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개념을 만들고, 그 개념으로 현실을 압축합니다.
핵심 개념: ‘아사비야(집단 결속)’를 분석 도구로 쓰다
이븐 할둔식 분석에서 유명한 축 중 하나가 집단 결속(아사비야)입니다. 중요한 건 이 단어가 “좋다/나쁘다”가 아니라, 사회 동학을 설명하는 변수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 결속이 강하면: 조직력↑, 위험 감수↑, 확장 가능성↑
- 결속이 약해지면: 내부 경쟁↑, 비용↑, 통치 안정성↓
개념을 이렇게 쓰면 사회 분석은 “인상평”이 아니라 “변수 중심 설명”으로 바뀝니다.
‘사회 분석’이 과학이 되는 조건 3: 비교를 통해 ‘법칙 후보’를 만든다
과학은 한 사례로 결론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사회 분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븐 할둔의 방식은 비교를 통해 반복 패턴을 찾는 것에 가깝습니다.
비교의 축을 고정한다
- 도시 사회 vs 유목/변방 사회
- 건국 초기 vs 번성기 vs 쇠퇴기
- 세금이 낮을 때 vs 높을 때
- 군사 조직이 단순할 때 vs 복잡할 때
비교 축이 고정되면,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의 사례가 “같은 질문” 아래 놓입니다. 이때부터 사회 분석은 과학처럼 누적됩니다.
‘사회 분석’이 과학이 되는 조건 4: 자료를 그대로 믿지 않는 ‘검증 습관’
사회 연구의 가장 큰 함정은 기록이 많을수록 더 믿기 쉬워진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기록은 언제나 편향을 가집니다.
- 승자의 기록일 수 있다
-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다
- 과장과 미화가 섞일 수 있다
- 숫자와 규모가 부풀려질 수 있다
이븐 할둔이 강조한 포인트 중 하나는, 기록을 인용하기 전에 그 기록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조건을 점검하는 태도입니다.
이 태도는 오늘날로 치면 “데이터 전처리”에 가깝습니다. 원자료를 그대로 분석하면 결과가 틀어지듯, 기록도 비판 없이 쓰면 사회 분석은 설득력 있는 소설이 되기 쉽습니다.
‘사회 분석’이 과학이 되는 조건 5: 인과를 “도덕”이 아니라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
사회 문제를 설명할 때 흔한 방식은 훈계입니다. “타락해서 망했다”, “열심히 안 해서 무너졌다” 같은 말이죠.
하지만 이런 설명은 검증이 어렵습니다. 이븐 할둔식 설명은 도덕 대신 메커니즘을 놓습니다.
예: 번영이 왜 쇠퇴로 이어질 수 있는가
- 번영 → 행정·군사 비용 증가
- 비용 증가 → 세금 증가 또는 수탈 강화
- 세금 증가 → 생산 의욕 저하, 이탈 증가
- 통치 약화 → 외부 집단의 도전 가능성 증가
이 흐름은 단정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그리고 구조는 다른 사례와 비교해 검증할 수 있습니다. 사회 분석이 과학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회 분석’이 과학이 되는 조건 6: 시간성을 ‘단계 모델’로 다룬다
이븐 할둔의 사회 분석은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모델로 설명하려 합니다.
- 건국/확장 단계: 결속 강함, 규율 강함, 단순한 조직
- 안정/번영 단계: 도시화, 행정 확대, 문화 발달
- 과잉/경직 단계: 비용 증가, 관료화, 결속 약화
- 쇠퇴/교체 단계: 외부 도전 또는 내부 붕괴
핵심은 단계 자체가 아니라, “단계가 바뀌는 조건”을 추적한다는 점입니다. 시간성을 단계 모델로 다루면, 사회는 ‘운’이 아니라 전환 조건으로 설명됩니다.
이븐 할둔을 ‘중세 아랍의 과학자’로 읽는 이유
정리해보면 이븐 할둔의 사회 분석은 자연과학의 방법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 관찰을 분해해 변수로 만든다
- 개념으로 복잡한 현실을 압축한다
- 비교를 통해 반복 패턴을 찾는다
- 자료를 비판해 신뢰도를 관리한다
- 인과를 도덕이 아닌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
- 시간성을 단계 모델로 정리한다
이 조합이 갖춰지면 사회 분석은 “말 잘하는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지식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사회 분석이 과학이 되는 조건’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바로 보이는 연결점
이븐 할둔의 프레임은 오늘날에도 여러 곳에서 자연스럽게 반복됩니다.
1) 데이터 시대의 사회 분석
요즘은 통계, 로그, 설문, 네트워크 데이터가 넘칩니다. 그런데 데이터가 많아도 분석이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유는 이븐 할둔이 이미 지적한 것과 같습니다.
- 단위(변수)가 불명확하면 비교가 안 된다
- 개념(모델)이 없으면 숫자는 잡음이 된다
- 자료 비판이 없으면 편향이 결과를 지배한다
2) 조직과 커뮤니티의 흥망
스타트업, 커뮤니티, 팀 조직도 비슷한 단계 변화를 겪습니다.
- 초기 결속(미션/팀워크) → 성장
- 성장(규모/프로세스) → 비용과 갈등 증가
- 결속 약화 → 핵심 인력 이탈 → 경쟁력 저하
이때 필요한 건 감정적 평가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결속이 약해지고 비용이 늘어나는지의 구조적 점검입니다.
사회를 과학처럼 다루는 태도가 남긴 것
이븐 할둔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정답”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 사회는 복잡하지만, 관찰과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 기록은 많지만, 비판과 검증이 없으면 지식이 아니다
- 인과는 도덕이 아니라 메커니즘으로 설명될 때 단단해진다
- 시간의 변화는 단계와 전환 조건으로 분석될 때 누적된다
이 관점으로 읽으면, 이븐 할둔은 단지 과거의 사상가가 아니라 중세 아랍의 과학자 전통이 사회 분석으로 확장되는 길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우리가 사회를 이해할 때 유효한 기준이 됩니다.